강경대열사추모사업회

91년도 투쟁

91년 봄 종로에 시위를 나가보면, 몇 십 만 명이 운집해 광화문에서
동대문 종로거리가 꽉 찼다.
그때는 정말 나라가 뒤집어지는 줄 알았다.
다음날 한겨레신문 1면에 그 사진이 났는데,
그 때의 전율은 아직도 생생하다.” – 하귀남

우리가 열사정신을 이어가는 노력으로 모든 열사들의 외침이 헛되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1991년의 우리 사회는 암울했습니다.​

당시 노태우가 야권분열로 인해 정권을 다시 잡았습니다.
노태우는 “지난날 인권시비가 일어날 때마다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내 아들 내 딸과 같은 젊은이들이,
그것도 조국의 내일을 염려하는 젊은이들 이 고문을 받았다는 보도를 접했을 때
말할 수 없이 부끄러웠다”며 국민 앞에 다짐한 위대한 보통사람의 시대를 열어가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보통사람 노태우 정권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폭력성을 드러냈습니다.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해야할 국가가 국민의 생명을 짓밟은 공권력으로 변한 것입니다.
장기집권을 꾀한 그에게 있어서 민주주의를 외치는 학생들과 생활 개선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은 눈엣가시였고,
때문에 그들에게 더욱 매서웠습니다.

그 해의 명지의 모습 또한 좋지 못했습니다.​

학생들은 부당한 등록금 인상과 일방적인 학사행정, 군사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며 투쟁해 나갔습니다.
그러던 중 총학생회장이었던 박광철군이 불법 연행되자,
4월 26일 학원자주화 쟁취, 불법 연행된 총학생회장 구출,
노태우 정권 퇴진을 외치는 시위를 하는 도중 강경대 열사는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맞아 병원으로 이송 중에 심장막 내출혈로 산화하셨습니다.

1991년 4월 26일은 그 선연하고도 끔찍한 봄의 시작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경대를 살려내라!”를 외치며 거리로 나왔습니다.
명지대학교 학생들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이 민주화를 외치며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강경대 사건은 5월 투쟁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5월 투쟁은 4월 26일부터 투쟁의 지도부가 명동성당에서 철수하는 6월 29일까지 전개되었으며,
노태우 정권 사상 최대의 규모의 시위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전남대 박승희를 비롯한 8명의 학생, 노동자, 빈민이 분신했고,
성균관대 김귀정이 시위 도중에 질식사했으며, 한진중공업 박창수 노조위원장이 의문사를 당했습니다.
이 시위는 ‘해체 민자당’, ‘타도 노태우’, ‘해체 백골단’ 등을 외치며 전국적으로 확대되었고,
동시에 종교계, 학계, 문화계까지 확대되면서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폭발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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